다른 여러 거장 감독들처럼, 거스 반 산트 (Gus Van Sant)도 나이가 들수록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정서적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바로, 십대 남자아이가 겪는 복잡하고, 여리고, 모호한 감정 상태...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Paranoid Park>(2007) 역시 겉으로는 청소년의 우발적 범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한 남자아이의 내적 혼란과 복잡한 심리상태를 이야기한다.
미국 소도시에 사는 한 청소년의 정신적, 정서적 방황에 대한 묘사에, 거스 반 산트 특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더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 내면적 '시간'에 대한 다양한 표현양식들이다.
우연한 살인으로 괴로워하는, 그러나 그 괴로움조차 유리벽 밖의 그 무엇처럼 모호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한 십대 남자아이의 내적 상태가 다양한 양태의 시간들로 표현된다.
주인공이 겪는 각각의 상황과 감정 상태에 따라 뚝뚝 분절되거나 조각조각 흩어지는 시간들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거나 천천히 늘어지는 시간들이, 혹은 마치 진공상태처럼 그대로 정지되어 있는 듯한 시간들이 영화 곳곳에 혼재되어 있다.
불규칙적이고 비연대기적인 시간의 상태는 주인공이 범죄 후 겪는 혼란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며, 그러한 시간의 인상과 느낌 또한 주인공이 살아내는 생의 인상과 느낌을 그대로 전달한다.
'공간'에 대한 인상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어느 장소이건 전체를 조망하는 일 없이 주인공이 지나치는 공간들을 대부분 분절의 상태로 보여준다.
수업을 듣는 학교의 교실도 그렇고, 가족이 있는 주인공의 집도 그렇고, 항상 필요한 공간만 분리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공간들은 서로 연결되기보다는 서로 단절되고 분리되는 느낌이다.
영화 후반,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자전거를 타며 지나치는 평온한 동네의 모습이 오히려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공간적 단절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중반, 익명의 아이들이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커다란 환기구 내부 같은 공간은
주인공을 포함한 한무리 십대 남자아이들의 심리적 공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양쪽으로 뚫려있지만 밖이 너무 밝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극히 단순하고 한정된 그 공간...
그 내부를 유영하듯 느리게 흘러다니는 십대 보더들...
그 공간은, 너무 밝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미래와 지극히 단순하고 제한된 현재를 살아가는 미국 십대들의 내적상태 그 자체다.
Ethan Rose를 비롯한 여러 비주류 뮤지션들의 음악도 긴 여운을 남기고,
온통 문신으로 무장한 자의식 과잉의 아버지와 한번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어머니의 모습도 짧지만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굳이 감독의 동성애 성향에 연연하며 이 영화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결정지었을 인생의 한 짧은 시기에 대한 기억을,
외적 사건들의 조각들이 아닌 내적 사건들의 조각들로 섬세하게 짜맞추어가는 감독의 노력이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또 하나의 단순한 이분법을 가볍게 넘어서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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