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7일 토요일

<밀레니엄 맘보>(2001) - 서늘한 청춘, 한 겨울 밤의 영화


 
영화에 대한 허우 샤오시엔의 사랑은 이 영화에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새어나온다.
일본 북해도에서의 유바리 영화제...
나이가 들수록 허우 샤오시엔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목소리를 찾아가는 듯 하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시점의 교묘한 불일치, 분란..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기는 2001년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10년 뒤에 여주인공 비키가 내뱉는 독백으로 전달된다.
그러니까 화자의 시간은 2011년, 이야기의 시간은 2001년.
 
게다가 화자의 내레이션과 이야기 토막들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내레이션이 화면에서 이어질 사건들을 미리 들려주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해주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내레이션과 사건이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더 골치아픈 건, 예상했던 대로 (허우 샤오시엔다운) 절제되고 또 절제된 사건 묘사...
마치 한 사건의 중요한 순간들은 다 피하고,
그렇지 않은 순간들만을 골라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영화의 서사구조 자체도 분산적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전반에 삽입된 눈 쌓인 유바리의 풍경.
어느날 밤, 여주인공 비키는 바에서 일하는 대만/일본 혼혈 형제에게 '언제 일본에 가게 되면 너희 만나러 유바리에 들려도 되냐'고 묻는다.
형제가 해마다 겨울 한 달 동안(유바리 영화제 기간동안) 할머니의 여관업을 도우러 일본에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바로 유바리 풍경이 이어진다.
하얀 눈이 수북히 쌓인 유바리의 밤 풍경...
비키는 형제 중 한 사람과 바에 앉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밤거리로 나가 수북히 쌓인 눈 가운데 몸을 던지며 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대만...
비키와 하오하오의 아파트. 어두운 실내.
 
 
 
 
영화가 끝날 때 쯤에야, 관객은 중간에 삽입된 유바리 에피소드가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말미에 일어날 일을, 그러니까 서사구조상 한참 뒤에(약 1년 뒤에) 일어날 일을 아무런 설명 없이, 아무런 단서 없이 불쑥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 플래시포워드는 비키의 상상 혹은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비키가 혼혈 형제에게 '언제 일본에 가게 되면 너희 만나러 유바리에 들려도 돼'라고 물을 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눈덮인, 차가운 일본의 유바리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을 테니까...   
지긋지긋한 타이뻬이의 밤을 넘어, 차갑고 푸르른 유바리의 밤을 유영하고 있었을 테니까...
 
결국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스무 살의 비키는 하오하오와 사랑에 빠져 타이뻬이에서 동거를 시작하지만, 대마초와 마약에 쩔어 사는 하오하오의 일상과 또 그의 의처증적 행각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던 중 클럽의 사장이자 조폭의 중간 보스 쯤 되는 잭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하오하오의 끈질긴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잭은 얼마 후 사업상(?)의 위험에 빠져 일본으로 급히 도주하고, 비키는 그를 찾아 일본 도쿄로 홀로 날아간다.
그러나 잭은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비키는 도쿄에 혼자 남아 방황하다가 겨울이 오자 유바리로 떠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혈 형제를 만난다.
 
 
 
 
물론, 이 단순한 줄거리는 통상적인 서술 틀에 얹히지 못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질 않는다.
영화의 전체 구조도 비키와 하오하오의 관계에 심하게 치중되어 있어 매우 불균형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 분산, 불균형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것은 영화의 라스트 시퀀스다.
라스트 시퀀스는 영화의 형식적 특징을 나타내는 그 모든 혼란, 분산, 불균형이 바로 영화의 주제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즉 영화의 주제는 청춘이고 청춘은 바로 혼란, 분산, 불균형 그 자체라는 걸...
 
뜨겁던 청춘의 한때를 차갑게 식혀주는 것은 일본 유바리의 눈 덮인, 푸르른 밤풍경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두터운 눈길의 설경은 차가움과 포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차가움으로  한때의 열기를 식혀주고, 포근함으로 모든 상처를 보듬어주는..
 
 
 
 
특히, 라스트씬에서 나열되는 이미지들은 청춘과 영화를 교묘하게 연결시킨다.
손으로 그린 옛날 극장간판들, 볼 빨간 옛 배우들, 눈 덮인 밤길을 걸어가는 비키와 두 형제, 그리고 새들만 돌아다니는 텅 빈 거리...
그렇게 서늘함과 온기가, 어둠과 불빛이 공존하고 있다.
 
결국, 청춘이란 게 그렇지 않을까...?
지나는 동안의 서늘함, 기억하는 동안의 온기, 매 순간을 지배하는 어둠과 불빛의 어지로운 충돌...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나가는 이미지들 앞에서의 서늘함, 기억하는 순간의 온기, 매 순간을 지배하는 어둠과 불빛의 어지로운 충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비키는 그토록 사랑했지만 매 순간 떠나고 싶어했던 하오하오를 떠올린다.
그는 마치 '해가 뜨면 녹아내릴 눈사람 같았다'고 회상한다.
해가 뜨면, 어둠이 물러나면 사라질 것이 또 있다.
영화, 그리고 아마도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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