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8일 일요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2014) – 올리비에 아사야스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 는 이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듯 하다.
영화 중반부터 이 영화는 이미 ‘마스터피스’의 수준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영화가 나오다니..!
연극/영화, 픽션/현실, 배우/등장인물, 과거/현재 등 세상의 모든 경계를 이토록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다니..!
그 모든 곳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암시들, 다채로운 은유들, 중층의 리퍼런스들..
경지에 오르다 – 줄리엣 비노슈의 연기
줄리엣 비노슈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아마도 ‘빨간 풍선'(허우 샤오시엔, 2008) 때부터였을까..?
그저그런 평범한 연기들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의 연기가 언젠가부터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기파 배우와는 거리가 있었고, 그렇다고 절세 미인이나 섹시 스타의 소리를 듣기에도 부족했던 애매한 정체성의 그녀였기에 나이가 들수록 왠지 초조해보였다..
그런데 ‘사랑을 카피하다'(키아로스타미, 2011)에서 놀랍도록 섬세한 감정 연기를 보여주더니, 이 영화에서는 드디어 만개한 연기의 수준을 보여준다.
자유자재의 감정 표현은 물론이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심리의 변화를 그때그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확성으로 드러내 보인다.
영화 내내 그녀의 얼굴은 거의 클로즈업으로 포착되지 않지만, 미디엄 숏의 화면에서도, 심지어 풀숏의 화면에서조차도 그녀의 얼굴은 다채로운 내적 변화와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어느새 그녀는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들이 그랬듯이 얼굴 연기만으로 자신의 영혼까지 드러낼 수 있는 단계에 오른 것이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딱딱하고 밋밋한 표정 연기는 결과적으로 비노슈의 얼굴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감독이 처음 그녀에게 의뢰한 역은 지적이고 자아 강한 매니저 ‘발렌틴’이 아닌,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성 여배우이자 스캔들 메이커인 ‘조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한 역할보다 평소 잘 알고 있지만 해보지 못한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의도는 연기의 폭을 넓히는 것이었고, 세간의 평은 어느 정도 그녀의 도전을 인정해주었지만(심지어,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이 영화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비노슈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던 말이다…
 경지에 오르에 오르다 –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연출
이 영화를 통해 재능이 만개한 이는 비노슈 뿐만이 아니다.
감독인 아사야스도 그의 경력의 정점에 오른 듯 보인다.
예술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서로 다른 세 여인의 감정 상태를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감독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자연의 변화와 삶의 변화, 그리고 감정의 변화를 이토록 절묘하게 겹쳐놓을 수 있는 감독, 그러면서도 동시대 사회상과 인간 군상을 예리하게 관찰해 풀어놓을 수 있는 감독…
데뷔 초기, 아사야스는 ‘겨울의 아이’와 ‘8월말 9월 초’  등의 영화들을 통해 트뤼포와 로메르를 잇는 또 다른 ‘프랑스적 감수성’의 감독으로 각광받았다.
섬세하면서도 깊이 있고, 절제되면서도 풍부한 감정 묘사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1990년대 중반 이후 아사야스는 아무런 특색 없는 평작들만을 내놓으면서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져든다.
초반에 잠깐 반짝이다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그저그런 수재들 중 하나로 잊혀져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여름의 조각들’을 내놓으면서 아사야스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다.
화려했던 프랑스 문화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섬세한 심리 묘사, 깊은 예술적 안목, 동시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 등으로 단번에 영화팬들을 사로잡는다.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개인을 얘기하면서도 시대와 사회를 얘기하며, 섬세하고 깊이 있는 예술론을 난해하지 않은 언어로 펼칠 수 있는 영화…
그것은 오로지 아사야스만이 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말이다.
아사야스는 그렇게 오랜 우회를 거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화로 돌아왔다.
황홀한 ‘월경’의 유희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황홀한 월경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감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관객은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세계가 서로 뒤섞이며 교차하는 황홀한 단계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픽션과 실재, 예술과 삶, 자연과 문명,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모두 걷히고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는 신비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그 황홀한 경험..
마치 리베트Jacques Rivettes의 영화처럼, 이 영화에서는 연극과 영화 그리고 현실이 자유롭게 서로 침투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월경 : 연극과 실재. 연극적 삶과 실재의 삶. 예술과 현실.. 리베트를 보는 듯..
….. 월경 : 자연과 문명
….. 월경 : 개인과 개인, 극적 자아와 실재 자아
아쉬운 점: 리퍼런스가 너무 분명~
이 광고에 대해
Occasionally, some of your visitors may see an advertisement here.

2015년 2월 1일 일요일

내 마음대로 뽑은 2014년 영화 best 10

내 마음대로 뽑은 2014년 영화 best 10 

외국 영화
1위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위 - 보이후드
3위 - 그녀
4위 - 내일을 위한 시간
6위 - 그레이트 뷰티
6위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7위 - 마미

한국 영화
1위 - 경주
2위 - 한공주
3위 - 자유의 언덕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파라노이드 파크 Paranoid Park> - 거스 반 산트 Gus Van Sant

 

 
다른 여러 거장 감독들처럼, 거스 반 산트 (Gus Van Sant)도 나이가 들수록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정서적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바로, 십대 남자아이가 겪는 복잡하고, 여리고, 모호한 감정 상태...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Paranoid Park>(2007) 역시 겉으로는 청소년의 우발적 범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한 남자아이의 내적 혼란과 복잡한 심리상태를 이야기한다  
미국 소도시에 사는 한 청소년의 정신적, 정서적 방황에 대한 묘사에, 거스 반 산트 특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더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 내면적 '시간'에 대한 다양한 표현양식들이다.  
우연한 살인으로 괴로워하는, 그러나 그 괴로움조차 유리벽 밖의 그 무엇처럼 모호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한 십대 남자아이의 내적 상태가 다양한 양태의 시간들로 표현된다  
 
주인공이 겪는 각각의 상황과 감정 상태에 따라 뚝뚝 분절되거나 조각조각 흩어지는 시간들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거나 천천히 늘어지는 시간들이, 혹은 마치 진공상태처럼 그대로 정지되어 있는 듯한 시간들이 영화 곳곳에 혼재되어 있다  
불규칙적이고 비연대기적인 시간의 상태는 주인공이 범죄 후 겪는 혼란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며, 그러한 시간의 인상과 느낌 또한 주인공이 살아내는 생의 인상과 느낌을 그대로 전달한다.
 
  
 
'공간'에 대한 인상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어느 장소이건 전체를 조망하는 일 없이 주인공이 지나치는 공간들을 대부분 분절의 상태로 보여준다  
수업을 듣는 학교의 교실도 그렇고, 가족이 있는 주인공의 집도 그렇고, 항상 필요한 공간만 분리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공간들은 서로 연결되기보다는 서로 단절되고 분리되는 느낌이다.  
영화 후반,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자전거를 타며 지나치는 평온한 동네의 모습이 오히려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공간적 단절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중반, 익명의 아이들이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커다란 환기구 내부 같은 공간은   
주인공을 포함한 한무리 십대 남자아이들의 심리적 공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양쪽으로 뚫려있지만 밖이 너무 밝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극히 단순하고 한정된 그 공간...  
그 내부를 유영하듯 느리게 흘러다니는 십대 보더들...   
그 공간은, 너무 밝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미래와 지극히 단순하고 제한된 현재를 살아가는 미국 십대들의 내적상태 그 자체다. 
   
Ethan Rose를 비롯한 여러 비주류 뮤지션들의 음악도 긴 여운을 남기고,  
온통 문신으로 무장한 자의식 과잉의 아버지와 한번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어머니의 모습도 짧지만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굳이 감독의 동성애 성향에 연연하며 이 영화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결정지었을 인생의 한 짧은 시기에 대한 기억을,  
외적 사건들의 조각들이 아닌 내적 사건들의 조각들로 섬세하게 짜맞추어가는 감독의 노력이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또 하나의 단순한 이분법을 가볍게 넘어서게 해준다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2008) -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그리고 하비에르 바르뎀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우리말 제목은 사실 상당히 깨는 편이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니..,!
가끔은 홍보담당자들의 상투적인 감각들이 실제 관객 수요에 적잖은 타격을 입힐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원제목을 그대로 번역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바르셀로나를 집어넣던가.
여전히 스페인이 대세인걸 모르나...?ㅎㅎ
 
원제목 대로 갔더라면, 적어도 스페인에 대해 환상이나 동경을 품고 있는 관객들을 좀 더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디 알렌, 바르셀로나, 스칼렛 요한슨, 하비에르 바르뎀, 페넬로페 크루즈...
이들의 조합만 제대로 홍보했어도 관객이 좀 더 들어왔을텐데..
  

 
 
스페인 남부지방을 상징하는 적갈색.
무엇보다 영화 내내 배경이 되어주는 다양한 건축물들의 적갈색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스페니쉬 기타의 음악도 감미롭고..
한 여름 밤과 낮 동안의 꿈 같은 영화 이야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간다.
 
우디 앨런과 홍상수는 자기가 아는 사랑과 자기가 아는 관계만 그린다.
그래도 홍상수에 비하면  우디 앨런은 인간관계, 사랑의 방식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편이다.
자기가 잘 알고 있고 선호하고 있는 관계 유형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다른 유형의 관계들도 적절히 제시하면서 한 편의 영화 안에 다양한 관계유형들이 공존하게 만든다.
이런 관계, 저런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도 서로를 반사하며 서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재주...
이 재주는 결코 홍상수가 갖지 못하는 비범한 재주다.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낯선 장소에서의 낯선 사랑, 또 누구나 한번쯤 일어나길 바라는 파격적이고 일탈적인 사랑...
 
다 좋았는데.., 미국인들에게는 스페인이 단지 낭만적 일탈의 땅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딱히 아니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곳에도 나름의 삶과 시간이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스칼렛 요한슨과 페넬레페 크루즈보다 카탈류냐 지방의 풍경이 더 아름다웠고,
카탈류냐 풍경보다 바르셀로나의 화가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의 변신이 더 인상적이었다.
첫 장면부터 포도주색 셔츠를 입고 등장하는, 퇴폐와 열정과 자유와 낭만의 화신 같은 남자... 
도대체 이 남자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그 무시무시한 살인자가 맞단 말인가...
 
 

<브로큰 임브레이스 Los Abrazos Rotos>(2009) - 평생을 지배하는 단 한 순 간, 한 번의 키스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의 다른 영화들보다 확실히 더 평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의 영화다.
늙은 부호의 젊고 아름다운 정부가 배우를 꿈꾸다가 어느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져 도피를 하는 이야기..
도피 도중 여자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남자 혼자 남아 여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너무나 흔하게 듣고 보던 이야기다.
 
 


 
그러나 이 흔하디 흔한 이야기마저도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는 가슴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는 강렬한 파장을 일으킨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스페인 남부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다운 색채,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평범하지만 애절한 사랑 이야기...
이 모든 것은 영화 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기묘하면서도 애틋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Broken Hugs', 스페인어 제목은 'Los Abrazos Rotos'...
그러니까 '깨어진 포옹'  혹은 '조각난 키스'...
 
스페인인들에게 Abrazos는 포옹과 함께 나누는 키스를 말한다.
진한 키스든, 가벼운 키스든..
 
 


   
사랑의 도피를 하던 두 남녀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 바로 직전에,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가벼운 키스를 나눈다.
짧은 포옹과 짧은 키스, 곧이어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읽고, 남자는 부상과 함께 실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는 그 짧은 키스의 순간을, 
짧지만 행복했던 사랑의 시간을 잊지 못한 채 평생 고독에 묻혀 산다.
 
먼 훗날 맹인이 된 남자가 우연히 구한 사고 당시 필름을 손으로 더듬으며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정말로 두고두고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 사고 직전 두 사람의 키스를 찍은 장면이 천천히 돌아가고,
부족한 화질 탓에 점묘화처럼 희미해진 이미지 위를 남자가 손으로 더듬으며 옛 사랑의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film)야말로 '보이는 이미지'를 넘어 '보이지 않는 이미지'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감독의 평소 신념이 절묘하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무튼 평생을 지배하는 단 한 순간, 마지막 키스...
 
나는 믿는다.
긴 생의 시간보다 한때의 짧은 사랑이 평생토록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사람보다 짧은 키스만을 나누고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평생토록 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모도바르는 이미 어떤 수준을 넘어섰다.
관조하듯 편안하게 평범한 사랑을 다루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며 지배하는 사랑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를 본 후 한참 동안 그 사랑의 힘에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 사랑의 힘이 어쩐지 인간을 짓누르는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밀레니엄 맘보>(2001) - 서늘한 청춘, 한 겨울 밤의 영화


 
영화에 대한 허우 샤오시엔의 사랑은 이 영화에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새어나온다.
일본 북해도에서의 유바리 영화제...
나이가 들수록 허우 샤오시엔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목소리를 찾아가는 듯 하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시점의 교묘한 불일치, 분란..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기는 2001년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10년 뒤에 여주인공 비키가 내뱉는 독백으로 전달된다.
그러니까 화자의 시간은 2011년, 이야기의 시간은 2001년.
 
게다가 화자의 내레이션과 이야기 토막들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내레이션이 화면에서 이어질 사건들을 미리 들려주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해주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내레이션과 사건이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더 골치아픈 건, 예상했던 대로 (허우 샤오시엔다운) 절제되고 또 절제된 사건 묘사...
마치 한 사건의 중요한 순간들은 다 피하고,
그렇지 않은 순간들만을 골라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영화의 서사구조 자체도 분산적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전반에 삽입된 눈 쌓인 유바리의 풍경.
어느날 밤, 여주인공 비키는 바에서 일하는 대만/일본 혼혈 형제에게 '언제 일본에 가게 되면 너희 만나러 유바리에 들려도 되냐'고 묻는다.
형제가 해마다 겨울 한 달 동안(유바리 영화제 기간동안) 할머니의 여관업을 도우러 일본에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바로 유바리 풍경이 이어진다.
하얀 눈이 수북히 쌓인 유바리의 밤 풍경...
비키는 형제 중 한 사람과 바에 앉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밤거리로 나가 수북히 쌓인 눈 가운데 몸을 던지며 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대만...
비키와 하오하오의 아파트. 어두운 실내.
 
 
 
 
영화가 끝날 때 쯤에야, 관객은 중간에 삽입된 유바리 에피소드가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말미에 일어날 일을, 그러니까 서사구조상 한참 뒤에(약 1년 뒤에) 일어날 일을 아무런 설명 없이, 아무런 단서 없이 불쑥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 플래시포워드는 비키의 상상 혹은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비키가 혼혈 형제에게 '언제 일본에 가게 되면 너희 만나러 유바리에 들려도 돼'라고 물을 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눈덮인, 차가운 일본의 유바리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을 테니까...   
지긋지긋한 타이뻬이의 밤을 넘어, 차갑고 푸르른 유바리의 밤을 유영하고 있었을 테니까...
 
결국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스무 살의 비키는 하오하오와 사랑에 빠져 타이뻬이에서 동거를 시작하지만, 대마초와 마약에 쩔어 사는 하오하오의 일상과 또 그의 의처증적 행각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던 중 클럽의 사장이자 조폭의 중간 보스 쯤 되는 잭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하오하오의 끈질긴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잭은 얼마 후 사업상(?)의 위험에 빠져 일본으로 급히 도주하고, 비키는 그를 찾아 일본 도쿄로 홀로 날아간다.
그러나 잭은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비키는 도쿄에 혼자 남아 방황하다가 겨울이 오자 유바리로 떠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혈 형제를 만난다.
 
 
 
 
물론, 이 단순한 줄거리는 통상적인 서술 틀에 얹히지 못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질 않는다.
영화의 전체 구조도 비키와 하오하오의 관계에 심하게 치중되어 있어 매우 불균형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 분산, 불균형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것은 영화의 라스트 시퀀스다.
라스트 시퀀스는 영화의 형식적 특징을 나타내는 그 모든 혼란, 분산, 불균형이 바로 영화의 주제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즉 영화의 주제는 청춘이고 청춘은 바로 혼란, 분산, 불균형 그 자체라는 걸...
 
뜨겁던 청춘의 한때를 차갑게 식혀주는 것은 일본 유바리의 눈 덮인, 푸르른 밤풍경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두터운 눈길의 설경은 차가움과 포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차가움으로  한때의 열기를 식혀주고, 포근함으로 모든 상처를 보듬어주는..
 
 
 
 
특히, 라스트씬에서 나열되는 이미지들은 청춘과 영화를 교묘하게 연결시킨다.
손으로 그린 옛날 극장간판들, 볼 빨간 옛 배우들, 눈 덮인 밤길을 걸어가는 비키와 두 형제, 그리고 새들만 돌아다니는 텅 빈 거리...
그렇게 서늘함과 온기가, 어둠과 불빛이 공존하고 있다.
 
결국, 청춘이란 게 그렇지 않을까...?
지나는 동안의 서늘함, 기억하는 동안의 온기, 매 순간을 지배하는 어둠과 불빛의 어지로운 충돌...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나가는 이미지들 앞에서의 서늘함, 기억하는 순간의 온기, 매 순간을 지배하는 어둠과 불빛의 어지로운 충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비키는 그토록 사랑했지만 매 순간 떠나고 싶어했던 하오하오를 떠올린다.
그는 마치 '해가 뜨면 녹아내릴 눈사람 같았다'고 회상한다.
해가 뜨면, 어둠이 물러나면 사라질 것이 또 있다.
영화, 그리고 아마도 청춘...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도쿄 소라 Tokyo Sora> (2002) - 이시카와 히로시

 
 
 '도쿄 하늘 아래 사는 여섯 여자의 이야기'라는 영화 포스터 설명에서 더 뺄 것도더할 것도 없는 영화.
각자 다른 일을 하고, 다른 환경 속에 사는 여섯 여자의 이야기가 아슬아슬하게 겹쳐져 있다.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하게전혀 관계 없는 여섯 여자의 삶이 잠깐씩 만났다가 다시 흩어진다
유명한 cf 감독 출신답게 감각적이고 독특한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도쿄의 하늘'을 뜻하는 영화 제목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영화는 도쿄의 모습도, 도쿄 하늘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인물들의 답답한 삶에 가끔씩 끼어 있는 하늘 조각들이 전부.
사실 인물들이 일본어를 써서 배경이 일본일 거라고 예상할 뿐, 일본인지 아시아의 어느 도시인지, 도쿄인지 일본의 다른 어느 도시인지도 분간하기 힘들다.

  
 

어쨌거나 영화 속의 도쿄는 답답하고, 흐리고, 건조하고, 적막한 공간들을 모아놓은 무성의한 구조의 집합 같다
불친절하게 잘린 그 공간들 속에서 담담하게, 쓸쓸하게 살아가는 여자들.
쓸쓸함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여자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침묵'이다.
영화 속에서는 침묵이 대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침묵 덕분에,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인물들의 머릿속이나 가슴속에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이미지가 스스로 말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영화.